‘육체 카메라’(corps-camera)로 체현된 윤리 의식: 다르덴 형제의 <아들> 카메라 움직임 및 촬영 기법을 중심으로
<아들> 카메라 움직임 및 촬영 기법을 중심으로
‘인물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당신의 연출이나 당신의 드라마 구성 밖에 존재하고 있으며, 당신의 프레임을 벗어나있다. (중략) 현실은 카메라에 저항한다.’¹
타자성에 근접하기 위해 작가감독이 먼저 한계를 인정하고 해체되어야 하는 미학.² 작가주의 영화 연출가의 전형으로 손꼽히는 다르덴 형제는 독창적인 영화 문법과 형식미학을 통해 현실에 근접한 인물들과 주제에 철저히 정제된 윤리 의식을 투영하고자 하였다. 자신들의 영화 노트 ‘Au Dos de nos images 1991-2005(On the back of our images 1991-2005)’에서 언급하듯, 다르덴 형제는 레비나스의 철학적 사유에 다수 근거하며 동시에 다큐멘터리스트로서 60여 편의 작업을 진행해 온 경력을 살려 특유의 영화 미학을 구축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적 시선과 윤리의식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대표 연출작 중 하나인 <아들>(Le Fils, 2002)의 카메라 움직임 및 촬영 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작법과 주제 구성 방식을 파악하고, 궁극적으로 ‘육체 카메라’를 위시한 형식미학적 개념과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연결지어 논의하고자 한다.
다르덴 형제들의 다른 연출작들과 유사하게 <아들>(Le Fils, 2002)에 등장하는 중심인물들의 설정은 구체적이지만 정작 스토리는 단조롭고, 영화는 사건의 흐름이나 연쇄를 중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셔레이드(charades) 기법을 활용한 인물들의 미세한 움직임과 표정, 혹은 긴 침묵, 반대로 짧게 구성된 대사와 구축 쇼트(establishing shot) 빠진 점프컷의 조합 따위가 주는 긴장감으로 영화가 견인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나아가, 여타 상투적인 드라마 장르 영화와 다르게 <아들>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설정인 ‘아들을 죽인 소년을 가르치는’ 노동자 Oliver가 깊은 상념이나 윤리 딜레마에 빠진 뉘앙스도 느껴지지 않으며, 작위적이거나 극적인 감정 분출 혹은 코드화된 서사 장치도 없다. 오히려 관객들이 ‘Francis와 Oliver의 적대 관계’에 대한 설정을 처음 접하게 되는 시점은 30분 가량이 지나 전 부인이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지는 순간부터이다. 물론 소년 Francis가 Oliver의 아들을 죽게 만드는 순간이나 Oliver가 자신의 아들과 함께하던 시절, 혹은 아들의 죽음 이후 파탄 지경에 이르렀던 어두운 과거를 환기하는 회상 신(scene)도 없으며, 카메라는 Francis의 소년원 수감 시절과 출소 이후 힘든 생활에 대해 직접 제시하기보다 대신 Oliver가 그의 집에 들어가 이를 가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다소 간접적인 접근법을 취한다. 다시 말해, 중심인물들의 설정과 사건은 관객에게 가독성 있게 제시되지 않는다. 이때 다르덴 형제는 애초에 인물의 설정과 사건을 온전하고 무결하게 재현할 수 없음을 이미 인정하는 듯 보인다. 다만, 다르덴 형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물 내면의 복잡성을 미묘하게 재현하는 데 주력하며, 이때 몸짓, 표정 등을 의도적으로 활용한 셔레이드(charade) 기법과 별도의 original score 없이 현장음만을 적극 수용한 사운드, 실제감이 부각된 장소 및 소품 등은 디제시스를 현실의 연장 수준으로 구현한다.³
반면 다르덴 형제가 첫 장면부터 러닝타임 내내 줄기차게 보여주는 것은 초점이 흐릴 정도로 클로즈업된 인물의 등(back)이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 <로제타>와 동일하게, <아들>은 인물의 등을 화면에 꽉 채우며 영화 도입을 알린다. 영화 내내 클로즈업된 인물의 뒷모습으로 관객은 제한된 시각적 정보를 전달받으며, 동시에 인물이 마주하는 광경은 보통의 시점 쇼트(point of view shot) 대신 어깨 너머로 보듯 묘사된다. 불안하면서도 때때로 절묘한 추적쇼트 속에서, 관객은 인물이 목격하는 광경을 몰래 쳐다볼 수는 있지만 인물의 행동이나 표정과 잘 대면하지 못한다. 가령 창문 너머 Francis를 처음 마주친 Oliver, 혹은 탈의실에서 Francis의 콧노래를 듣는 순간 카메라는 Oliver의 표정을 짐작할 여지를 남길 뿐이다. 덧붙여 Oliver와 Magali의 대화, Oliver와 Francis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 다르덴 형제는 대화장면에서의 일반적인 A-B컷, 즉 쇼트/역쇼트 구분이나 롱쇼트를 활용하기보다, 핸드헬드 기법의 체스트샷으로 인물 사이를 옮겨다닌다. 이를 통해 대화는 동시성을 상실하고, 관객은 대화의 연결감보다는 인물 간의 단절과 침묵에 더욱 집중한다. 또한 발화자 이외 상대방 인물이 짓는 표정이나 반응은 별도의 리액션 쇼트(reaction shot)로 구분되어 드러나기보다 핸드헬드 줌렌즈의 움직임 속에서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하며 대면 상황은 공간적으로 분리된다. 일반적인 A/B컷, 리액션 쇼트 대신 카메라의 임의적인 롱테이크로 촬영되는 대화 장면에서 관객들은 인물의 표정이나 몸짓에 집중하도록 유도되며, 나아가 인물의 신체와 인격이 내화면에 한정되지 않고 허구적 디제시스 바깥까지 확장된 듯한 느낌까지 받게 된다.⁴
<아들>의 카메라 움직임과 촬영 기법에 더욱 초점을 맞춰보자. 카메라는 온전히 핸드헬드로, 아이레벨(eye-level)에서 인물과 일상을 가깝게 담는데 주력한다. 인물의 정면보다는 측면이나 후면이 주로 보이며, 배우의 표현된 셔레이드(charade)를 빠짐없이 포착하고자 한다. 또한 인물의 움직임, 특히 숨소리와 동기화된 카메라는 인물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거나 급박하게 움직일 때 함께 흔들리며 진동한다. 반대로 인물이 침묵하거나 생각에 잠겼을 때 카메라는 함께 멈춰있다. 영화 도중 차 안의 덜컹거림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때, 카메라의 동기화는 계획적으로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다르덴 형제는 인터뷰에서 “바닥에 배우의 동선을 표시하지는 않는다. 테이크마다 발생하는 변수들이 긴장감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촬영을 많이 한다. 같은 시퀀스를 많은 버전으로 찍어서 좋은 것을 선택한다. 편집이 끝날 때까지 세트는 허물지 않고 재촬영을 대비한다.”⁵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이 철저한 영화적 구성 속에서도 즉흥연기의 긴장감, 밀도 있게 짜여진 촬영 구도 모두를 의도하면서 마치 다큐멘터리 이상의 실제감을 연출하려는 듯 보인다. 또한 뤽 다르덴은 자신의 영화노트 ‘이미지의 뒷모습 1991-2005’에서 영화 내내 쉴 새 없이 진행되는 카메라 움직임을 두고 ‘핸드헬드 카메라를 어깨에 장착한 다르덴 형제의 촬영감독들이 배우들과 함께 고도로 안무된 발레동작과도 같이 움직여가면서, (…) 수많은 리허설을 거치는 과정의 결과이다.’라고 말한다.⁶
이때 발레동작과도 같이 계획된 인물의 몸짓은 비전문 배우들의 아우라(aura)를 거쳐 현장성 강한 셔레이드(charades)로 표현되며, 대체로 인물의 심리(또는 숨소리)와 동기화된 카메라 움직임 및 핸드헬드 기법과 결합하여 즉흥성과 현장성을 가중시킨다. 이때 관객은 카메라의 시점이 마치 육체에서 뿜어져나오는 눈빛인 듯한 착각을 받게 된다.
이렇듯 촬영 기법은 영화의 현장성 및 동시성, 즉흥성을 강조하여 디제시스에 현실감을 부여하고 나아가 카메라의 시선에 신체감각을 결부시키는데 집중하고 있다. 카메라의 시점으로부터 육체감이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는 순간을 고르자면 바로 ‘차 안’이다. 카메라는 자동차와 함께 덜컹거리며 앞좌석의 Oliver, 그리고 Francis를 보여주는데, 이때 카메라는 주로 뒷좌석에서 앞 인물의 뒷모습 혹은 도로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 졸린 Francis가 눕기 위해 뒷좌석으로 넘어가는 순간 뒷좌석의 카메라는 자연스레 앞좌석으로 이동한다. 카메라맨이 화면에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물을 바라보는 시점 변화에 따라 관객은 카메라가 마치 빈 좌석을 찾아 자리를 잡는 듯한 느낌, 나아가 차 안에 자신의 육체가 실존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된다.
영화가 사건을 가독성 있게 제시하기보다 인물의 심리 재현에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점은 관객들이 인물의 내면을 좀처럼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구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가령, 목재소로 가는 도중 Francis는 Oliver에게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네 후견인이 되려면 나도 알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며 왜 사람을 죽였는지 묻는 자동차 앞좌석의 Oliver를 뒷좌석 시점에서 바라보며, Oliver가 정말 후견인이 될 생각이 있는지 관객들은 물론이고 Oliver 자신, 혹은 다르덴 형제도 단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영화 후반부 목재소에서 ‘네가 죽인 꼬마가 내 아들이었다’는 Oliver의 고백 후 도망치는 Francis를 말리며 ‘내려와! 그냥 얘기만 할거야’라고 Oliver가 회유하는 순간, 혹은 마침내 Oliver가 Francis를 붙잡고 억지로 눕혀 목을 조르는 자세를 취한 순간, 관객은 Oliver가 Francis를 해칠 생각이 없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예측할 수 없는 인물 간의 긴장감과 관객의 서스펜스를 형성하고 해소하는 영화의 상징적인 지점으로 각각 ‘목재소에 가는 길’과 마지막 장면을 꼽을 수 있다. 영화 후반부 Oliver와 Francis는 직업훈련소에서 공구와 목재를 포장할 밧줄을 챙긴 후 차를 타고 목재소에 향하는데, 이때 목재소는 멀고 으슥한 곳에 있다. Francis는 자신이 죽인 소년의 아버지인 Oliver에게 멋모른 채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며, ‘네가 한 일을 후회하’냐는 Oliver의 질문에 ‘그것 때문에 5년이나 소년원에서 썩었기’ 때문에 후회한다고 답한다. 반면 Oliver는 Francis의 가난한 사정을 모른 체하며 카페에서 자신의 빵만 계산하고, 운전 중 차 옆좌석에서 잠이 든 소년 Francis를 연신 바라본다. 이렇듯 사소한 행동들과 말투는 인물 내면의 복잡한 심리와 인물 간 긴장감을 점점 강화하면서, 관객들은 Francis가 모르는 상황(‘네가 죽인 꼬마가 내 아들이었다’)을 알고 있는 데 대한 서스펜스와 함께 분위기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고조된 분위기는 목재소 창고에 들어와 Oliver가 Francis에게 사실을 밝히는 장면에서 정점에 이르고(‘네가 죽인 꼬마가 내 아들이었다’), Francis는 겁을 먹고 도주하며 Oliver는 그를 쫓아간다. 이때 목재를 던질 정도로 격한 추격전은 카메라의 급박한 흔들림, 눈높이(eye-level)를 벗어나 목재 위로 올라간 인물들을 담는 앙각과 함께 다소 위협적인)이며 소유와 나의 힘들에 저항한다.(“The face resists possession, resists my powers.”) 보다 적절하게 얼굴의 표현은 나(주체)의 힘들의 나약함에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힘에 대한 나(주체)의 능력 자체에 거역한다. 얼굴은 나에게 말을 걸고, 가령 향유 또는 지식과 같이 힘의 행사와 어울리지 않는 어떤 관계로 나(주체)를 초대한다. 주체의 감각-경험적 판단 바깥의 타자의 얼굴은 최상의 힘이나 평가 가능한 에너지를 발휘하며 나를 대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총체적 관계를 초월한 무한함으로 주체에게 저항한다. 그 무한함은 우리를 대면하며, 그의 얼굴은 이렇게 말을 건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은 단순한 파괴, 힘과 이성으로의 종속 수준을 넘어 타자를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절멸(annihilation) 그 자체에 준한다. 그리고 얼굴의 현현은 총체적 파괴의 유혹 투로 전달된다.
이렇듯 긴장된 분위기가 해소되는 지점은 바로 마지막 장면이다. 숲에서의 몸싸움 이후 Oliver는 Francis의 목을 조르기 직전에 정신을 차려 다시 목재소로 돌아오고, 창고에서 가져온 목재들을 차수레에 실어나르기 시작한다. 이때 숲에서 돌아와 덩그러니 선 Francis가 내화면에 진입하고, Oliver와 Francis는 어색하게 조우한다. 두 인물은 서로 경계하는 듯 보이다가, Francis가 목재를 수레에 싣고 Oliver와 함께 목재를 밧줄로 포장하는 이때 영화는 막을 내린다. 중요한 점은 긴장감의 해소가 어떤 방식으로 제시되는지인데, 이때 배우들의 미묘한 표정과 눈빛 등의 셔레이드(charade)와 밧줄이라는 소품은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데 핵심 요소로 작동한다.
영화가 끝나기 직전 Francis는 포장을 위해 목재를 붙잡고 있고, Oliver는 차 트렁크에서 밧줄을 꺼낸다. 관객들은 혹시나 Oliver가 밧줄로 Francis 뒤에서 그의 목을 조르는 건 아닐까 다시 한 번 긴장하게 되고, Francis 역시 이를 의식하고 있는 듯 불안한 눈빛으로 목재를 붙잡고 있다. 그리고 관객들의 염려와 달리, Oliver는 Francis 뒤에서 밧줄로 포장지를 두르기 시작하자마자 화면이 어두워진다. 이때 관객들은 둘 사이의 관계가 종결되지 않았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살인자와 ‘살인할 수 없음’을 동시에 담은 ‘육체 카메라’
영화 중반 직업훈련을 마친 Francis를 집에 바래다주는 Oliver에게 전 부인 Magali가‘왜 그러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Oliver는 ‘나도 모르겠어’라고 답한다. Oliver가 왜 러닝타임 내내 Francis와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납득하기란 쉽지 않으며, 영화가 끝난 이후 둘은 어떻게 관계를 이어나갈 것인지는 묘연하다. 다만 다르덴 형제가 자신들의 영화 미학과 작법에 투영한 윤리의식을 점검하면서 두 인물의 관계맺기가 시사하는 바를 추론해 볼 수 있으며, 이 글에서는 레비나스 사유와의 연결에 집중하고자 한다.
다르덴 형제 특유의 작가주의 연출 미학은 그들이 영화를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지에서 출발한다. 다르덴 형제는 영화를 ‘인간성에 접근하는 방식’이며(a way of gaining access to humanity), ‘영화의 사명은 인간(적) 응시를 포착하는 것’(the vocation of cinema is to capture the human gaze)⁷으로 규정한다. 이때 다르덴 형제가 제시하고자 하는 인간성에 가장 큰 지대한 영향을 준 사상가로 단연 레비나스를 뽑을 수 있다. ‘타자의 현상학’을 전면에 내세운 철학자 레비나스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지향하는 인간적 응시, 즉 타자성(alterity)을 완결 및 고정된 총체(totality)의 일부 혹은 자기-동일성(self-sameness)으로 편입하지 않으려는 미학적 도전의 풍부한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다. 실제로 다르덴 형제의 첫 장편 극영화 연출작이자 공교롭게 레비나스가 세상을 떠난 당시 촬영된 <약속>(La Promesse, 1996)에 대해 뤽 다르덴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 영화(‘약속’)는 궁극적으로 대면-마주침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⁸
대면-마주침(‘face-to-face encounter’)은 레비나스가 주창한 타인의 얼굴(‘visage/face of the Other/other’) 개념과 직결된다. 이때 얼굴은 ‘나와 타인 사이에 일어나는 윤리적 사건’으로서 총체(totality)를 벗어난 현현(‘epiphany’)이며 소유와 나의 힘들에 저항한다.(“The face resists possession, resists my powers.”) 보다 적절하게 얼굴의 표현은 나(주체)의 힘들의 나약함에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힘에 대한 나(주체)의 능력 자체에 거역한다. 얼굴은 나에게 말을 걸고, 가령 향유 또는 지식과 같이 힘의 행사와 어울리지 않는 어떤 관계로 나(주체)를 초대한다.⁹ 주체의 감각-경험적 판단 바깥의 타자의 얼굴은 최상의 힘이나 평가 가능한 에너지를 발휘하며 나를 대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총체적 관계를 초월한 무한함으로 주체에게 저항한다. 그 무한함은 우리를 대면하며, 그의 얼굴은 이렇게 말을 건다. “살인하지 말라.”¹⁰ 살인은 단순한 파괴, 힘과 이성으로의 종속 수준을 넘어 타자를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절멸(annihilation) 그 자체에 준한다. 그리고 얼굴의 현현은 총체적 파괴의 유혹으로서뿐만 아니라, 이 유혹과 시도에 대한 순수하게 윤리적인 불가능성으로서 살인의 유혹에 대한 무한함을 재단할 가능성을 생산한다. 결국 얼굴의 현현과 ‘살인할 수 없음’은 모두 윤리적이다.¹¹
<아들>의 전작이자 형식상 유사한 <로제타>의 마지막 장면은 다르덴 형제가 레비나스의 ‘살인할 수 없음’과 ‘대면-마주침’ 개념을 영상 매체에 구현하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빈민 실업자인 주인공 로제타는 결말부에 이르러 자신이 생활하는 여행용 캠핑카 안에서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때 가스가 다 떨어진다.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가스통을 산 후 캠핑카로 힘겹게 옮기다가, 배신한 친구 리케의 분노한 눈빛에 좌절하며 주저앉는다. 이때 리케는 주저앉아 흐느끼는 로제타를 일으켜 세워주고, 로제타는 화면 밖 리케를 바라본다.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와 리케의 대면을 내화면에 가독성 있게 제시하는 대신, 리케의 얼굴을 관객이 볼 수 없도록, 나아가 로제타가 단지 리케뿐 아니라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듯 제시한다. 이 얼굴은 신이 아닌 리케의 형상으로, 압도적인 위력이 아닌 가르침의 무한함으로 로제타를 대면한다. 이 얼굴은 분명 관객의 감각-경험 바깥에 있지만 내면의 울림을 주고 있으며, 이 얼굴로 인해 로제타는 당장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얼굴은 ‘살인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¹³
<아들>로 돌아와보자. Oliver와 Francis는 직업훈련소의 스승과 제자로 관계를 맺는데, 이는 레비나스가 내세운 Master-student 간 가르침의 외재적 무한함을 상기시킨다. 즉, 이들의 관계 맺기 시도는 단지 노동의 재생산 혹은 전과자 교화 등 사회구조적인 쟁점을 상징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인간성을 잃지 않는 윤리적 관계에 대한 모색에 가깝다. 이때 관객은 영화의 윤리적 관계에 대한 모색에 초대되어, 살인자 Francis에 대한 ‘살인할 수 없음’의 명령에 침묵하고 번민하는 Oliver를 지켜보게 된다. 이 두 인물 간의 거리는 영화 중반부 ‘줄자’로 잴 수 있을만큼 계산되고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대화는 보통 핸드헬드로 단절되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평행선에 선 채 짧은 말들이 오고 간다. 그러나 두 인물은 러닝타임 내내 노동과 가르침을 통해 점점 근접해지며,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숲에서의 격한 몸싸움을 통해 어느 때보다 근접하게 된다. 이때 Oliver에게 내려진 ‘살인할 수 없음’ 명령(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살인할 수 없음’ 명령은 타자의 총체적 파괴임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포기함을 지칭하기도 한다)과 살인자 Francis의 병치가 주는 서사적 긴장감은 어느 때보다 진동하는 카메라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앞서 분석하였듯, 현장성과 즉흥성을 의도한 카메라 움직임과 촬영 기법의 조합은 카메라의 시선이 마치 육체에서 뿜어져나오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리고 촬영감독과 촬영 보조의 발레 동작처럼 의도된 움직임을 통해 얻어진 이 시선을 두고 뤽 다르덴은 ‘육체 카메라’(corps-camera)라고 이름 붙인다. ‘육체 카메라’(corps-camera)란 뤽 다르덴이 고안한 단어로, 마치 유령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디제시스 내에 체현된 듯한 카메라, 동시에 인물 내면의 보이지 않는 장소(‘the brush with the invisible body within the visible body’¹⁴)를 촬영하는 카메라를 의미한다. 이 영화적 육체는 관객의 시청각과 동기화된 후 마치 관객이 유령이 되어 쉽사리 보이지 않는 인물 내면을 체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더불어 핸드헬드와 클로즈업 속에서 초점과 중심을 잃고 요동치는 제한된 시청각 경험 속에서 관객은 ‘몸과 물체들을 통해 흐르는 어떤 에너지¹⁵)’를 느낀다. 이 에너지는 인물의 내면을 직접 말하거나, 극적인 서사장치로 드러내어 상투적인 동일시 효과를 경유하지 않고도, 즉 관객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경험에서 인물을 이해하지 않고도 생생하게 열린 감각을 통해 인물들의 공감을 시도하고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나아가 디제시스는 현실에 동일시되는 거울이 아니며, 인물은 관객이 동일시하거나 관음할 대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육체-카메라는 동일시와 거리두기 사이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물과 관객 간 관계 맺기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준다.’¹⁶
결론
이번 글에서는 카메라 움직임 및 촬영 기법을 위시한 시각적 제시 방법에 집중하여 다르덴 형제의 ‘육체 카메라’ 개념을 분석하였지만, 다르덴 형제는 현장 소음과 숨소리 등 청각적 요소 역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며, 연기 이론, 몽타주, 미장셴, 로케이션 및 소품 등 다양한 측면에서 주제의식을 구성하고 구체화했다. 또한 주변화된 개인들의 초상을 주제화하며 벨기에 사회 시스템에 대해 분석적인 접근을 취했으며, 노동과 인간 소외, 가족 해체 현상 등 다양한 사회적 쟁점을 냉철하게 다뤄온 점도 특기할 만하다.
레비나스는 대표작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윤리는 안광학(optics)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다른 유형의 관계 혹은 지향으로서, 비전(vision, 전망, 상상)의 개관적이고 총체화하며 객관화하는 본성이 없는, 즉 이미지 없는 비전(a “vision” without image)이다.’¹⁷ 다르덴 형제는 레비나스의 이미지 없는 비전, 즉 ‘타자의 현상학’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고유한 영화미학을 구축하고, 영화라는 시청각 매체 속에서 레비나스의 사유를 계승하고자 했다. 레비나스에게 ‘프로덕션’(production)이라는 단어는 이중적이며 애매한 성질을 갖는데, 즉 ‘존재의 발효’(사건이 “생성된다”, 자동차가 “생산된다”)와 ‘드러나는 것 혹은 전시/노출’(논쟁이 ‘보여지다’, 배우가 ‘보여지다’’)을 모두 일컫는다. 이 동사의 애매성은 존재가 초래되며(is brought about) 동시에 밝혀지는(is revealed) 작동 자체의 본질적 애매함을 담고 있다. 다르덴 영화의 ‘프로덕션’은 이 ‘본질적 애매함’을 포착하고자 하는데, 다르덴 형제의 영화 작업, 즉 프로덕션은 인물과 사건을 드러내보이는 동시에 현실과 맞먹는 디제시스를 생성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디제시스는 영화적 동일시나 거리두기의 차원을 넘어, 재현 아닌 재현으로서 현실 세계 속 타자를 향한 욕망의 환유(metonymy)가 된다.
참고
¹ Bert Cardullo (2011), World Directors in Dialogue, Lanham: Scarecrow, p 101.⏎
² 박은지 (2015), 우정의 정치학 - 다르덴 형제 영화의 숨막히는 생명력, 앙가주망의 역사와 오늘날의 앙가주망: 2015년도 프랑스학회 가을학술대회, p 91.⏎
² 유사하게, Mike D’Angelo이라는 블로거는 ‘지난번에 내가 본 영화’가 아닌 ‘작년에 내가 알던 사람들에게 생긴 일’과 같이 느끼는 혼란스러운 관람경험’이라고 재치있게 표현했다. (Mike D’Angelo. 1997. “Review of La promesse.” The Man Who Viewed Too Much [weblog], May 26. [!http://www.panix.com/~dangelo/col12.html#/apr.htm/)] ⏎
⁴ 위의 지적과 유사하게 Sara Cooper는 ‘Their framing brings fictional lives into being but can never fully contain them: their characters’ bodies overflow the edges of the frame, rather than being contained within the shots.’라고 말하며 뤽 다르덴이 자신의 작업 방식을 ‘연속성 있게 촬영하여 결국 인물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방법’(Luc Dardenne [2005], On the Back of Our Images (1991-2005). p 166)으로 언급한 사실을 인용하고 있다. Sara Cooper (2007), Mortal Ethics: Reading Levinas with the Dardenne Brothers, Film-Philosophy, 11.2.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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⁵ Anthony Kaufman, Interview article “Rosetta Directors Jean-Pierre and Luc Dardenne’s Cinema of Resistance”, http://www.IndieWire.com, 1999. 재인용: 박성훈 (2010),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뤼크 다르덴 영화에 나타난 스타일 연구 - 셔레이드 기법을 중심으로, 한서대학교 대학원, 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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⁶ Luc Dardenne (2005) Au Dos de nos images 1991-2005, p 175, 재인용: 박은지 (2015), 우정의 정치학 - 다르덴 형제 영화의 숨막히는 생명력, 앙가주망의 역사와 오늘날의 앙가주망: 2015년도 프랑스학회 가을학술대회,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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⁷ Luc Dardenne, [2005] 2019. On the Back of Our Images (1991-2005). Translated by
Jeffrey Zuckerman and Sammi Skolmoski. Chicago: Featherproof Books.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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⁸ ibid p 42, 재인용: Sara Cooper (2007), Mortal Ethics: Reading Levinas with the Dardenne Brothers, Film-Philosophy, 11.2. p 71. 원문은 ‘Tout le film peut être vu comme une tentative d’arriver enfin au face-à-face’(The entire film can be seen as an attempt ultimately to reach the face-to-face enco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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⁹ Emmanuel Levinas (1961), Totality and Infinity - An Essay on Exteriority(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ériorité), Martinus Nijhoff Publishers and Duquesne University Press, p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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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⁰ ibid. p 199. 영문은 다음과 같다. “This infinity, stronger than murder, already resists us in his face, is his face, is the primordial expression, is the first word: “you shall not commit murder.”⏎
¹¹ ibid. p 199, 영문은 다음과 같다. “The epiphany of the face brings forth the possibility of gauging the infinity of the temptation to murder, not only as a temptation to total ·destruction, but also as the
purely ethical impossibility of this temptation and attempt. (…) The epiphany of the face is eth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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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² break-down image 출처: https://medialifecrisis.com/acting-out/popgap-28-rosetta-19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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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³ 여기서 조아라(2020)는 클로즈업된 얼굴-이미지와 ‘얼굴의 현현’(epiphany of the face)을 연결지으며, ‘라비브의 ‘클로즈업 얼굴 이미지’ 논의 , 즉 영화의 클로즈업 얼굴 그 자체에 타자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함께 고려하여 다르덴 형제 영화 속에 나타나는 ‘얼굴-이미지’ 자체를 탐구했다.’ 반대로 Sara Cooper(2007)는 조아라(2020)의 지적대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간의 얼굴보다는 대사와 서사 속에서 얼굴을 찾고자 노력하는 경향을 보인다.’ 두 논의 모두 본 글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레비나스의 영화적 사유를 공공연히 주창한 다르덴 형제가 레비나스의 핵심 테제인 ‘얼굴’을 쉽사리 그의 사유와 대치되는 방식으로 재현했다고 보지 않는다. 가령, 레비나스는 이렇게 밝힌다. “얼굴로서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은 드러난 것 그리고 순전히 현상적인 형태를 너머 무언가를 부과하는 것, 어떤 이미지의 중개 없이, 면대면의 바로 그 직접적임, 드러냄으로 축소될 수 없는 양식으로 누군가를 제시하는 것이다”(Levinas, 1961) 이외에도 레비나스는 얼굴이 외양을 띠지 않고 ‘불가시’(invisible)함을 논하고 있으므로 얼굴의 현현이 그대로 클로즈업된 얼굴-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다는 분석은 다소 위험해보인다. 즉, Sara Cooper의 지적대로 face-to-face 개념이 영화 매체로 구현되고 있지만 레비나스적 연결을 보여주는 것은 (<약속>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말 그대로 인물 간 대면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Igor가 양심 고백하며 비틀거리는 등’에 가깝다. 또한 뤽 다르덴(2005)은 <아들>의 시작부를 알리는 올리비에 구르메의 등을 마치 얼굴인 듯하다고 말한다.(“as if this back, this neck were speaking”) 따라서 클로즈업된 얼굴 이미지에서 이를 유추하기보다 앞서 언급한 외화면 얼굴과의 대면, 대면하지 않는 조우 상황, 혹은 등의 이미지들을 통해 논의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본다. 결국 인물들은 분명 타자(other)이지만 인물들의 얼굴은 타자의 얼굴(face of the Other)이 아니며 이때 레비나스의 ‘얼굴’은 일종의 오용(catachresis)으로서 작동한다.(Judith Butler, 2004) 반면 나는 다르덴 형제가 클로즈업 기법을 통해 (타자와의) 근접하면서 혼란스러운 경험을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데, 이는 조아라(2020)의 논점과 공명하고 있다.
(위 인용된 레비나스(1961) 영문은 다음과 같다. “To manifest oneself as a face is to impose oneself above and beyond the manifested and purely phenomenal form, to present oneself in a mode irreducible to manifestation, the very straightforwardness of the face to face, without the intermediary of any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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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⁴ Sara Cooper (2007), Mortal Ethics: Reading Levinas with the Dardenne Brothers, Film-Philosophy, 11.2. (원어는 ‘l’affleurement du corps invisible dans le corps visible’(Luc Dardenne [2005], On the Back of Our Images (1991-2005). p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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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⁵ 재인용: 조아라 (2020), 타인의 얼굴 - 다르덴 형제 영화 <로제타>, <아들>에 나타난 얼굴 이미지의 타자성 연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p 50. 원문 출처는 Luc Dardenne, [2005] 2019. On the Back of Our Images (1991-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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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⁶ 박은지 (2015), 우정의 정치학 - 다르덴 형제 영화의 숨막히는 생명력, 앙가주망의 역사와 오늘날의 앙가주망: 2015년도 프랑스학회 가을학술대회, p 91.⏎
¹⁷ Emmanuel Levinas (1961), Totality and Infinity - An Essay on Exteriority(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ériorité), Martinus Nijhoff Publishers and Duquesne University Press, p 23. 영문은 다음과 같다. “Ethics is an optics. But it is a ‘vision’ without image, bereft of the synoptic and totalizing objectifying virtues of vision; a relation or an intentionality of a wholly different type-which this work seeks to de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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